소년이, 소년의 친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소년이, 소년의 친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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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반갑습니다. 안내를 맡은 국립5·18민주묘지 해설사 이민자(60)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맞춰 참배단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민주의 문’을 출발해 민주광장과 추념문을 지나 참배단까지 인도한 뒤) 향을 세번 집어 분향하시겠습니다. (분향을 마치자) 두 걸음 물러서십니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영령에 대하여 경례와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경례…. 바로…. 묵념…. 바로….
이제 묘역으로 가시겠습니다. (1구역 1번 묘소 앞에 멈춰 서며) 김경철님은 1980년 5월 광주의 첫 희생자입니다. 청각장애인 제화공이셨어요. 귀가 도중 금남로에서 계엄군에 붙잡혔습니다. 들리지 않아 계엄군의 지시를 근로자전세자금대출금액
따르지 못했는데 못 듣는 척한다며 더 가혹하게 폭행했습니다. 온몸 구타에 따른 사망(19일)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해설할 땐 차마 맞아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못 해요.
“우리 막둥이는 벙어리여. 에려서 열병을 앓아서 말을 못해. 광주에서 내려온 사람이 그란디. 시내에서 군인들이 벙어리를 곤봉으로 뚜드려 죽였다고. 벌써 오래디았다고.”(리치안위버
한강 ‘소년이 온다’)
묘지번호 1구역 1번부터 2구역 52번까지는 항쟁 당시 사망하신 분들의 묘소입니다. 망월동 묘지(현재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손수레와 청소차로 실려 와 묻힌 분들이 1997년 이쪽으로 이장되며 사망 날짜 순서로 안장되셨어요. 53번부턴 부상을 입고 생존하셨던 분들이 돌아가신 차례대로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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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역 26번으로 이동해) 박금희님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셨어요. 21일 오후 1시 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울리는 애국가를 신호로 계엄군들이 조준사격(도청 앞에서만 41명 사망)을 합니다. 박금희님은 피를 보태달라는 방송을 듣고 헌혈버스에 올라 병원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아요. 시신 훼손이 심해 가족들은 손목시계로 겨우 알아봤다고혼합상환
합니다. 중년이 된 친구들이 17살 얼굴 그대로인 금희님의 묘소 앞에 모여 친구가 좋아했던 팝송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를 부르며 눈물 흘리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피가 부족해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가두방송을 들은 그녀들은 각자 헌혈을 하러 병원에 갔고….”
그해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5월24일 제가 살던 개인파산조회
해남엔 비가 왔어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렸지만 무슨 일이 났는지 버스가 다니지 않았어요. 비를 쫄딱 맞으며 산길을 달렸습니다. 춥고 무서워 덜덜 떨며 뛰었어요. 광주 사는 큰언니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와 있었습니다. 한동안 광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학살 때문이란 사실은 나중에 알았어요. 그날 광주에선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난사된 총알부산대학교 취업지원
에 맞았습니다.
(2구역 22번 묘소의 사진을 보며) 전재수님은 최연소 사망자(11살)입니다. 학교의 휴교로 마을 동산에서 놀고 있었어요. 송암동을 지나던 11공수여단의 무차별 사격을 피해 도망가다 신발 한쪽이 벗겨집니다. 며칠 전 형이 사준 새 고무신이었고 아끼느라 신지도 못했다고 해요. 되돌아와 주우려 할 때 총알들이 작은 몸을 관통합드라마 내생에 봄날
니다. 사진을 찾지 못해 41년이나 얼굴 없는 희생자로 계셨어요. 아버님 유품 정리 과정에서 이 한장이 발견돼 2021년 어린이날에야 겨우 얼굴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제 오빠는 광주에서 재수 중이었습니다. 가두방유한회사
송을 듣고 뛰쳐나가다 멈추기를 반복한 끝에 결국 나가지 못했다고 훗날 말하더군요. 동구청 공무원이었던 형부는 피가 흥건했던 금남로를 떠올리면 지금도 진저리를 칩니다.
27일 도청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분들은 2구역 11번부터 52번 사이에 계십니다. 36번 박병규님은 동국대 1학년 학생이었어요. 비상계엄 전국 확대(17일)를 걱정한 부모의분양권매매계약
강권으로 광주로 내려오자마자 시위에 참여합니다. 소설 ‘소년이 온다’의 진수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 탓에 내려온 진수는 희생자를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합니다. 최후 항전 직전 상황실장의 지시를 받고 여자들이 도청 밖까지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동행하며 지켜줍니다. 박병규님이 그랬어요. 그때 도청을 나와 죽음을 피한 여성분들이주택 취득세
그 사실을 증언했고 묘지에 와서 참배도 하셨어요. 박병규님은 도청에서 돌아가셨지만, 체포돼 고문을 받은 진수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상황실장이 김진수를 지목해 그 일을 맡긴 건 유난히 가냘프게 생긴 그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서였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짐작과 달리 그는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습니다.”
(오른쪽 두번째 묘소로 옮겨) 16살 문재학(2구역 34번)님입니다. 26일 아들을 데리러 온 어머니에게 친구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도청에 남겠다고 합니다. 소년 ‘동호’의 실제 모델인 만큼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참배객 열의 예닐곱분은 이곳에 들릅니다.
“세차게 팔을 잡아당겨 너는 엄마의 손을 떨쳐냈다. 걱정 마요, 며칠만 일 거들다가 들어갈게요. 정대 찾아서.”
저는 문재학님보다 한살 어립니다. 문재학님이 죽임을 당한 나이(1981년)에 광주의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교 3년 동안 학교에선 ‘그해 5월’을 입에 올린 선생님이 없었어요. 말이 감금당한 시대였으니까요. 2011년 이 묘지에서 ‘죽은 자들의 해설사’가 됐습니다. 망자들은 산 자들을 통해 기억되고, 기록되고, 말해집니다. 저는 제 일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는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정대의 시신을 찾아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죽은 동호처럼 문재학님은 같은 묘지에 친구를 두고도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소년에게 온 참배객들을 ‘말의 징검다리’로 4구역의 친구에게 연결하며) 양창근님이 정대입니다. 문재학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어요. 21일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의 총에 머리를 맞습니다. 원래 1구역 38번에 안장돼 계셨어요. 아니 그렇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곳에 양창근님은 없었어요. 2021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4구역에 모셔진 ‘무명열사들’의 유전자를 검사했는데 96번의 신원 미확인 희생자가 양창근님으로 밝혀졌습니다. 41년간 ‘양창근의 묘’에 계셨던 분은 김광복(14살)님이셨고요. 그동안 시신을 찾지 못했던 김광복님의 묘비는 봉분 없는 행방불명자 묘역(10구역 4번)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아저씨의 배 위에 모르는 형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어.”
가족이 혈육의 몸을, 영혼이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시간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참혹했습니다. 유전자 채취를 위해 양창근님 등이 안장된 무명열사 묘 3기를 개장하던 날(2021년 11월19일) 날씨가 급변했습니다. 갑자기 비바람이 불었어요. 쳐놓은 천막이 날아가고 파놓은 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갔습니다. 2010년 12월 리영희(7구역 4번) 선생님을 모실 때도 그랬어요. 겨울에 비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고, 눈까지 날렸어요.
“이 비는 먼저 가신 혼들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기억과 추모에도 격차는 있었다. 참배의 발길도 ‘유명 희생자들’의 묘소로 몰렸고 그들 옆(☞7회 ‘친구의 자리’)에 묻혀야 눈길에라도 밟힐 수 있었다. 해설은 사실이 규명되고 축적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희생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해설할 사실이 쌓이지 않았다. 뭉뚱그려지고 덩어리진 목소리들 속에서 영들이 수런거렸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들이 묘소마다 펄펄 끓었다. 우리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우리 이야기를 해달라고 혼들(1·2묘역 합해 1028명)이 들썩였다. 해설사들이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들려주고 있을 때 참배객들 속에 섞여 듣는 이들 중엔 그들의 혼도 있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진 않을까?”
이민자는 ‘소년이 온다’의 문장들을 뽑아 얇은 발췌본을 만들었다. 그만의 해설서였다. 소설과 이어진 희생자들의 묘소 앞에 설 때면 참배 온 학생들과 몇 대목을 같이 낭독했다. 소설이 현실과 오차 없이 겹치진 않았지만 죽은 ‘동호들’과 ‘정대들’과 ‘소년들’의 이야기가 그의 입을 통해 짧은 삶을 누렸길 바랐다.
“저희 할머니가 여기 계세요.”
올해 45주기를 며칠 앞두고 시내 중학교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을 때 1학년 남자아이가 말했다. 누구시냐는 이민자의 질문에 아이가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최미애. 최미애 할머니요.”
그 이름.
1980년에 그는 23살이었다. 5월21일 제자들을 걱정하며 휴교 중인 학교로 간 남편(고등학교 교사)이 돌아오겠다던 시간에 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집 앞에 나가 기다리던 그의 머리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다. 8개월 된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달려 나왔을 때 이미 숨이 끊긴 그의 뱃속에서 태아가 발길질을 했다. 살고 싶었는지 한참을 요동치던 아기의 숨도 엄마를 따라 사그라들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이 묘지의 영정이 되면서 그는 ‘오월의 신부’로 불렸다. 당시 걸음마를 막 뗀 첫째(아들)는 성인이 돼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는 체험학습으로 온 묘지에서 ‘우리 할머니’를 소개했다.
“미안해요.”
할머니 묘소(1구역 60번)로 학생들을 데려가 해설하던 이민자가 고개를 떨구며 말을 멈췄다. 아이로부터 할머니를 빼앗은 어른들 가운데 자신도 있는 것 같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우느라 결국 안내를 중단한 건 “해설사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인생 15년 동안 ‘혼들의 입’이었던 그가 6월 정년을 맞아 퇴임한다. 그는 매일의 해설을 마치기 전 소설 발췌본에 자신의 말로 적어둔 ‘클로징 멘트’를 읽었다. 해설사로서의 시간을 닫으며 그가 그 멘트를 찾아 읽는다.
“흔히들 진실은 불편하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직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직시하는 것은 고통을 마주하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문영 | 텍스트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